法門漢字語變換 (20251019 - transcript)
如是我聞 - 妙空
/ 大岸
觀行錄
觀行이 길이다
빙그레 미소로 사랑한다.
빙그레 미소로 幸福하다.
빙그레 미소로 解脫이다.
빙그레 미소로 健康하다.
빙그레 미소로 感謝하다.
빙그레 미소로 魂感謝
빙그레 미소로 몸 感謝
빙그레 미소로 經驗感謝
빙그레 미소로 父母祖上感謝
빙그레 미소로 空氣感謝.
빙그레 미소로 물 感謝
빙그레 미소로 太陽感謝
빙그레 미소로 햇볕 感謝
빙그레 미소로 大自然感謝
빙그레 미소로 法理感謝
機械的으로 이 15個를 읊어 봅니다.
이제 觀行을 하였으므로 15個의 항목에 票示를 합니다.
"正"字를 세 개 쓰면 15個가 됩니다.
이것을 갖고 無爲無限法에 씁니다.
”없구나. 이것뿐. 慈悲回向. 그냥 있음. 我空法空. 慈悲回向
" 한 번, 두 번, 세 번, 네 번, 다섯 번 반복하면서 "觀行錄"에다가 체크를 합니다.
"觀行錄"은 세 가지 種類가 있습니다.
"修行點檢表"가 처음로 나왔습니다.
"無爲無限寶"가 두번째로 나왔고,
"관행이 길이다"가 세 번째로 나왔습니다.
이 세 가지를 갖고 觀行을 합니다.
同事攝人이라면 이것을 갖고 놀아야 합니다.
複雜하게 느껴질 수 있으나 어려우면 안 해도 됩니다.
그러나 싫어하는 대신 빙그레 미소로 사랑한다 말하면서 宇宙를 사랑하는 것이 뭐 그렇게 힘들겠습니까?
빙그레 미소로 내 幸福을 確認하고, 解脫을 確認하고, 健康을 確認하고, 感謝하는
것이
무엇이 힘들겠습니까?
힘들다고 생각할 뿐입니다.
빙그레 미소로 魂感謝, 몸 感謝, 經驗
感謝, 父母祖上感謝, 空氣感謝, 물 感謝, 太陽
感謝, 햇볕 感謝, 大自然感謝
, 法理感謝하는 것이 그리 複雜합니까?
스스로 複雜하다라고 생각하는 念體를 만든 것 뿐입니다.
이것이 얼마나 좋은 놀이입니까! 우리 善慧님이나 一地님이 이런 것을 아주 잘 하는데 善慧님이나 一地님은 "無爲無限法" 이것을 百卷
以上표시하고 있습니다.
百卷.
그런 사람들은 完全히 마음이 열려 있어 道人으로 살고 있다고 생각합니다.
이제 "修行點檢表"에 아홉 가지 ◯表를 치는 것인데, 생각이 業
이고,
말이 業이고, 행동이 業입니다.
業은 因果를 밟아 갑니다.
생각 水準을 높게 하는 것이 觀行錄입니다.
水準높게 생각을 하면 그 생각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생각을 낮은 水準으로 하면 낮은 생각의 사람이 바로 그 사람입니다.
그런데 이觀行은 最高水準이라고 생각하지 않습니까?
"이 一物은 모두의 幸福을 爲하여修心
하고 和合하고 作善한다."
頓忘瞑想은 "없잖아. 이것뿐. 慈悲回向"인데 이것 하나만으로 동그라미를 그려도 되고 몇 번 해도
됩니다.
"없잖아. 이것뿐. 慈悲回向"
"없잖아. 이것뿐. 慈悲回向"
몇 번 하고는 동그라미 하나를 "觀行錄"에 그려 주어도 됩니다. 한 번만 해도 相關없습니다.
그 다음에 知足瞑想입니다.
빙그레 미소로 사랑한다.
빙그레 미소로 幸福하다.
빙그레 미소로 解脫이다.
빙그레 미소로 健康하다.
빙그레 미소로 感謝하다.
빙그레 미소로 魂感謝.
빙그레 미소로 몸 感謝.
빙그레 미소로 經驗感謝
빙그레 미소로 父母祖上感謝.
빙그레 미소로 空氣感謝.
빙그레 미소로 물 感謝.
빙그레 미소로 太陽感謝.
빙그레 미소로 햇볕 感謝.
빙그레 미소로 大自然感謝.
빙그레 미소로 法理感謝.
이렇게 해서 "觀行錄"에 또 하나 동그라미를 그립니다. 더 하고 싶으면 더해도 相關없습니다.
다음은 非我瞑想입니다.
全體가 있을 뿐이지 어디에 個我가 있겠냐…
全體重重緣起하는 全體宇宙
가 하나입니다
全體가 하나인 宇宙
의 一部分
이 自我宣言을 어떻게 할 수 있습니까?
無我觀하는 方法이 여러 種類가 있습니다.
全體가 한 덩어리인 宇宙, 한 덩어리 全體가 나인데,
自我宣言
이 있을 수 없습니다.
이것이 내가 主로 하는 非我觀입니다.
非我觀하는 여러 가지 方法中에 가장 古典的인 方法이 있습니다.
魂과 몸이 나라고 하는데 몸이라고 해 봐야 地水火風입니다.
地水火風인데 地가 나냐? 水가 나냐? 火
가 나냐? 風이 나냐?
나라고 할 만한 것이 없습니다.
이것이 地水火風입니다.
마음도 受想行識입니다.
그럼 受는 受이고, 想은 想일
뿐이지.
그것이 나냐? 行은 行일 뿐이지.
識은 識主體機能일 뿐인지. 그것이 나냐?
그래서 受想行識마음은 受想行識일뿐이지 나라고 하는 것은 없습니다.
그러면 地水火風이므로 몸뚱이를 나라고 할 수가 없고, 受想行識이므로 마음을 나라고 할 수가
없습니다.
이렇게 하고 또 "觀行錄"에 동그라미를 치고, 다시 觀行錄의 非我瞑想
에 표시를하는 것입니다.
그리고 "구나 - 겠지 - 感謝"瞑想입니다.
"구나 - 겠지 - 感謝"한다고 누가 나한테 뺨을 때리겠습니까.
"구나 - 겠지 - 感謝"도 한번 합니다.
설령 누가 따귀를 때렸다면
"아무개가 내 따귀를 건드리는구나.
그럴 때는 그럴만한 事情이 있겠지.
따귀 한 번 때린 程度로 끝내 주니 얼마나 感謝하냐.
그만하니 얼마나 感謝하냐."
"구나 - 겠지 - 感謝"할 수밖에 없습니다.
그런데 나는 그냥 宇宙를 "-구나".
宇宙全體가 "-구나".
宇宙가 움직이면서 重重緣起하면서 서로 因과 果를 이루면서 움직이고, 그 因에 그 果, 因果
하면서 無限反復합니다.
이런 式으로 이 意識놀음을 하는 것입니다.
意識놀음을 이런 式으로 해서 또 "나-지-사"에 ◯表를 칩니다.
죽음瞑想입니다.
나에게는 生死가 없습니다.
흐름이 있을 뿐입니다.
죽음은 숨이 끊어지고. 피돌이가 멈추는 것입니다.
그러면서 흘러가고 있는 中입니다.
이를 왜 죽음이라고 이름을 붙이느냐고요.
그냥 흘러갈 뿐입니다.
變化가 있을 뿐, 삶이니, 죽음이니 나눌 필요가 없습니다.
내 속에서는 이것이 確然해서 죽음이라는 槪念이 없습니다.
앙하고 태어나서,
가나다라를 배우고, 한 生을 살고, 하다가 그저 呼吸이 그치고 피돌이가 멈추면 다른 옷으로 바꿔 입고…
그저 흘러가는 흐름이 있을 뿐이지, 어디에 生과 死가 있냐는 생각을 갖고 있습니다.
이런 式으로 내가 最高次元의 생각을 하면 最高의 善行입니다.
"없잖아. 이것이 바로 最高作善이지요.
이렇게 意識을 가지고 놀고 있으니까 意識이 最高水準
의 意識이 될 수밖에 없습니다.